마산 청보리' 사는 이야기

라스트 오브 어스 등 요즘 게임을 논하다.

마산 청보리 2019. 10. 14. 19:13

대학 시절 스타크래프트에 빠졌던 이후로는 게임과 담쌓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유명한 콘솔 게임기(TV에 연결해서 가지고 노는 비디오 게임기)의 세일 소식을 접했습니다. 평소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다시는 이 가격에 살 수 없다는 점원의 멘트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게임기가 제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게임에 거부감이 있는 어른은 아닙니다. 오히려 게임도 건강한 여가생활이자 취미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믿음과 사랑을 북돋우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게임기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한 달 정도는 게임 타이틀, 옛날로 치면 게임기에 꽂아 즐기는 '게임 팩'을 사들이는 재미에 빠져 살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놀 게임과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게임, 2인용 게임, 슈팅 게임, 스토리가 좋은 게임 등을 종류별로 구비했습니다. 30만 원 넘게 들었습니다. 게임기가 24만 원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셈이죠. 그래도 주문한 게임 타이틀이 도착할 때마다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콘솔 게임에 적응하기까지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었습니다. 왕년에 PC 게임만 해본 터라 콘솔 게임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게임기를 내려놓기에는 잔뜩 사들인 게임들의 그래픽과 스토리, 몰입감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게임 타이틀을 넣고 게임기를 구동할 때 나오는 배경음악과 인트로 영상을 보며 감탄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엔딩까지 본 게임은 '호라이즌 제로 던'이라는 액션 RPG입니다. 아포칼립스(전염병이나 핵전쟁, 기후변화 등의 재난으로 인류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상)가 배경인 이 게임은 조금 특별합니다. 대부분의 게임과는 달리 백인만 주연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전투신이 많은데도 주인공은 남성이 아닙니다. 에일로이라는 여전사의 이야기입니다.

호라이즌은 단지 상대를 죽이고 레벨을 올리는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나아갈 방향과 인간의 심성,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대작이었습니다. 또한 게임 속 집단이 주인공을 대하는 방식을 보며 우리 사회의 다수가 개인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도 닮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놀자고 시작한 게임이 묵직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한동안 호라이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현실 생활에 지장을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감동의 여운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입니다. 유익한 책을 읽고, 멋진 영화를 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감동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에일로이를 통해 저는 또 다른 삶,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삶의 본질 고민하는 대사... 요즘 게임이 이렇습니다  

호라이즌과의 만남은 제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호라이즌 같은 대작은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초반에 대작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고수들의 조언이 그제야 이해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게임을 해야 하나 걱정도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괜한 기우였습니다. 얼마 후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명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콘솔 게임을 하시는 분들 중 라스트 오브 어스, 일명 '라오어'를 모르시는 분은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그만큼 완벽한 게임입니다. 라오어는 인류 멸망의 위기 속에서 살아남아 인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엘과 엘리의 이야기입니다. 액션과 스토리, 감동, 그래픽 등에서 빠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매 챕터를 클리어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재료를 모으고, 모은 재료를 바탕으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미션을 수행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무기를 사용하기는 하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게임 개발자들이 어떤 의도로 게임을 만들었는지, 게임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면 감동은 불어납니다.

또한 이 게임의 배경인 미래 세계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사람과의 관계, 다툼, 꾸밈은 사치일 수도 있겠다 싶은 대사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현재, 제가 하고 있는 고민 중에도 사치스러운 고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임 개발자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런 대사들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는 감동했습니다.

라오어도 엔딩을 보고 난 후 한동안 다른 게임을 켤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라오어는 특별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지고 있는 라오어는 본게임 외에도 메이킹 영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메이킹 영상을 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게임을 위해 애썼는지, 배우들의 실제 연기와 성우들의 열연, 게임 제작과 편집과정을 보며 또 다른 전율을 느꼈습니다. 단지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는 게임이 아니라 게이머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게임 체질입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 중

게임을 단지 시간을 뺏고 인생을 낭비하는 활동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게임 애호가라면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식으로 미래에 투자하라는 충고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라는 뜻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게임은 누군가의 노력과 열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게이머는 게임을 즐기며 다른 삶과 상황에 대해 간접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게임은 의외로 자기주도적인 놀이입니다. 게이머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며 스토리가 달라지는 게임도 많습니다. 아이와,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새로운 대화 소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11살·6살인 저희 아이들도 (엄마의 동의 하에) 저와 함께 게임하며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갑니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학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접경험 또한 필요합니다. 요즘 게임은 그 질적 완성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미 VR(가상현실) 게임도 대중화됐고 과거, 현재, 미래, 다른 나라까지도 가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어쌔신 크리드' 같은 게임은 고대 이집트, 중세 유럽 사회를 실사 수준으로 구현해 게임하는 내내 그 시대에서 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뭐든 100%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같은 경험을 해도 무언가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필요한 능력은 어떤 매체를 접하느냐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주체적으로 습득하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은 시간 많은 이들이 할 것이 없어서 하는 잉여 체험이 아닙니다. 훌륭한 문화산업입니다.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왜 하는지, 어떤 게임이 재밌는지를 묻는다면 또 다른 사유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밖에 노는 애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부모의 역할 중 하나였다면 최근에는 집에만 있는 애들을 밖에 나가 놀라고 데려나가는 부모님이 많이 계신다고 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 변화를 알고는 있으나, 본인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게임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요즘 아이들의 환경이 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같은 게임을 하며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는 경험 또한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게임을 통해 책에서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정보와 경험들을 얻고 있습니다. 게임은 '찌질한' 이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 많은 이들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활에 활력이 필요할 때, 환기가 필요할 때, 저는 게임기를 켭니다. 사실 제가 최근 다쳐서 집에만 있었는데, 게임이 없었다면 마냥 우울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게임은 저에게 또 다른 세계이며 또 다른 삶의 활력소입니다.
 
저는 게임 체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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