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 치고 이 분의 성함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식객>, <비트>, <날아라 슈퍼보드>, <꼴>, <아스팔트 사나이>, <48+1>, <꼬마대장 망치>, <타짜>, <커피한잔 하실래요.>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등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히트 작품을 그려내신 분입니다. 게다가 작품들 중 영화한 된 작품도 많습니다. 작품성이 인정받았다는 뜻이겠지요.
그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공부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작가가 의도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허영만작가님의 만화를 읽다보면 왠지 책을 재미있는 책을 읽는 듯한 뿌듯함이 있습니다.
허영만작가님의 작품은 깊이가 있습니다. 기자 못지 않는 취재력이 그의 큰 능력입니다. 사실을 재대로 구현하려는 세세한 그림 또한 그의 장기입니다. 제가 마산에 살고 있는데 식객에 보면 마산 아귀찜 골목이 나옵니다. 그 책을 들고 그 곳에 가서 비교해보니, 이럴수가! 실사 수준이었습니다. 현장을 그림으로 그대로 옮긴 듯 했습니다. '커피한잔 하실래요.'에서도 실제 커피숖을 방문하셨고 현실감을 위해 매장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만화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돼.' 라는 생각을 깨치게 만든 작가님이 바로 허영만님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가부터 그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만화일기'를 접했습니다. 상당한 호기심이 일었고 망설임 없이 책장을 펼쳤습니다.
-오랜 버릇이 있다. 훌쩍 떠난 여행길에서 만화로 기행문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행지 말고도 하루하루의 일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언젠가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을 읽으면서부터다. 선생은 글로 일기를 썼으니까 나는 만화로 일기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어쩌다 주위의 재미있는 상황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 손해라도 본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출판사 청탁을 받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저 그리는 것이 즐거웠다.(시작하며 중)
제가 읽은 책은 <허영만의 만화일기 3>편입니다. 2014.1월부터 2015. 5월까지의 내용들입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그날,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만화로 작가님이 만화로 표현한 만화일기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작가님의 지인은 누구시며, 술을 아주 좋아하시는 것, 그리고 몸을 위해 금주의 기간을 가지신 것, 나이듦에 대한 걱정, 현실적 고민, 손자 이야기 등 그의 인간적인 면까지 볼 수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독자들을 위해 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본인에게 하는 이야기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내 나이 67세, 19세 때 상경해서 무던히도 열심히 살았다. 나는 내가 이렇게 타의에 의해서 만화를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다른 줄 알았다. 나는 힘이 떨어질 때까지 그리다 연필을 놓을 줄 알았다. 자! 이젠 세상 돌아가는 걸 인정하자!! 화실도 줄이고, 용돈도 줄이고, 자동차, 골프, 술, 모두 줄이자! 남은 30년을 즐겁게 보내자. 지금껏 마감에 쫗기면서 잘도 버텼다. 족쐐를 깨버러라! 날개를 달고 크게 휘저어라. 제 2의 인생을 또다시 화려하게 꾸며보자!(53페이지)
전반적으로 이 책은 잔잔합니다. 읽다보면 절로 미소가 생깁니다. 작가님의 위트있는 그림과 재치있는 글 덕분입니다. 하지만 한 컷, 한 컷을 그리실 때의 마음을 읽으려다 보면 왠지 짠한 마음도 듭니다. 그가 나이들어 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의 만화를 보며 자란 저 또한 나이들어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들을 우울하게 대하지는 않습니다.
-'식객 대동여지도' 기획안과 샘플원고를 만들어서 청와대 농림비서관 정환근씨와 삼성경제문제연구소 부사장 민승규 박사에게 보냈다. 즉각 답이 왔다. 너무 좋으니 내일 만나서 얘기하잔다. 농수산부에서 지원하겠단다. 너무 반응이 빨라서 놀랐다. 우울했던 요즘이었는데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71페이지)
만화를 글로 옮길 수가 없음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책속, 이 글 밑에 있는 한 컷짜리 그림을 글로 표현하자면 전화를 받고 있는 허영만작가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전화기를 잡고 내일 약속을 잡으며 입으로는 '알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일은 화실출신 문하생들이랑 스승의 날 저녁 식사예정인데...쩝'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좋은 일이라고 해서 세상 다 가진듯 흥분하지 않으며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표현에도 그림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분명 허영만 작가님 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그린 작품이지만 읽다보면 나의 일상처럼 느껴집니다.
368페이지의 제법 두툼한 책입니다. 만화책이고 호흡이 좋아 금새 다 읽었습니다. 오래 앉아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신 분들께 쉽게 추천드릴 수 있는 책입니다. '허영만의 만화일기 3'을 접하고 나니 당연히 '1, 2'권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보통의 자서전이나 일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 신화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가 하는 개인적 고민은 읽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이 너무 빨리 끊나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허영만 선생님은 지금도 만화일기를 쓰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영만 작가님의 만화계 입문이 올해로 10년, 데뷔 42년째라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니 쌓이는 것은 작품이고 없어지는 것은 머리칼이라고 농을 던집니다. 만화를 그만둘 때가 다가 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작품 또한 있어서 무리한 욕심인지, 당연한 욕심인지 고민도 하십니다.
만화가이전에 인간 허영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현란한 그림과 장대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진솔함과 편안함은 최고입니다. 책을 읽고 싶으나 시간이 부족하신 분, 새 책을 쉽게 선택하여 읽기가 약간 망설여지는 분, 그리고 허영만 작가님과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흥미로웠지만 그의 현실 속 이야기는 따뜻합니다.
그의 작품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영만의 만화일기 3 - 허영만 지음/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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