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청보리가 읽은 책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마산 청보리 2018. 1. 9. 07:00

간만에 17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을 읽었습니다. 간단히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페미스트라, 페미스트라, 이거 뜨거운 감자아냐? 남성들을 무시하고 여성들만 옹호하는 자들아냐? 성평등이라는 전제 아래 남녀 역차별을 요구하는 자들이 쓴 책아냐?' 그리 깔끔하지 않은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들의 문제인가?


-2017년 7월 27일, 인터넷매체 <닷페이스>에 인터뷰 영상이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영상에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왜 학교 운동장엔 여자아이들이 별로 없고 남자아이들이 주로 뛰놀까? 이상하지 않아요?" "페미니즘은 인권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가정이나 사회나 미디어에서 여성혐오를 배우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오. 그대로 사회에 나가면 차별하거나 당하는 사람으로 자랄 거예요."(서문 중)


서문을 읽는 데, 순간 당황했습니다. 저는 운동장에 남자아이들만 뛰어 노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남자아이니까 운동장에서 노는 거고 여자아이들은 실내에서 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말씀 중 아이들이 가정이나 사회나 미디어에서 여성혐오를 배운다는 말씀에서도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가정, 사회, 미디에서 여성혐오를 배운다고? 난 여성혐오라고 느낀 적이 없는데? 아, 나 역시, 남성우월주의의 생각에 빠져있었구나. 아이들의 인권에 민감하지 않았구나. 당연하다고 알아왔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인문서적 출판사인 동녘에서 기획하여 세상에 나온 책입니다. 동녘 편집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거나 수긍할 독자들이 있는 반면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반발하실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입장과 방식이 각자 다를 테니까요. 공감하고 수긍하는 분들은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이 확대될 수 있도록 함께 하실 거라 믿습니다. 불편하거나 반발심이 드는 분들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에 근거한 비방이 아닌 경청할 만한 반론을 제기해 주신다면, 학교 현장의 성평등 교육이 더 정교해지고 단단해지는 데 보탬이 되겠지요. 이 책이 그런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저는 남교사입니다. 나름 성평등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아이들을 대해왔습니다. 나름 공평한 교사라고 떳떳하게 말해 왔습니다. 남학생들에게 이런말까지 했었습니다. "남자는 아무리 화가 나도 여자를 때리면 안돼. 여자를 때리는 남자는 남자도 아닌거야. 약자를 때리는 것은 비겁한 거야. 여자는 남자가 보호해야 할 존재들이야." 저는 여학생들이 이 말을 전해들으면 '역시 용샘, 여성들을 존중하는 것은 용샘뿐이야.'라고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성을 위하는 척하면서 철저하게 여성을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 여학생을 때리면 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때리면 안되는 것이라고 말했어야 옳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하지만 반면 이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는 글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분들의 경험담이 소개됩니다. 홍혜은, 김현, 이승한, 장일호, 이민경, 각자의 학창시절과 삶에서 당했던 일들을 추억하며 왜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한지를 적어냅니다.

-내가 경험한 교육현장에는 '남자는 반드시 이래야 하고 여자는 반드시 이래야 하는'것 따위는 없다는 걸 일러주는 선생님보다 '씩씩한' 사내아이와 '조신한'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걸 교육의 목표라 여기는 선생님들이 더 많았다...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어떤 사람이 됐을까.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을 것이고, 내 상처를 잊겠다고 남을 상처 입히는 걸 예사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본문 중)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교사가 되기 전 학생인 시절이 있었고 학창시절을 회상하니 인간이기 앞서 남자애, 여자애로 구분되어 달리 대우받았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별로 인한 차이보다 남자들간, 여자들간 개인적 차이가 더 크다고 합니다. 남성상을 강요받는 모든 남자애들이 행복할 리 없고, 여성상을 강요받는 모든 여자애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속에 관념화 되어 있는 남성상, 여성상으로 아이들이 자라면 결국 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요? 이 생각까지 하게 되니 한국사회에서 성차이에 따른 차별이 얼마나 뿌리박혀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1부만 읽어도 흥미로웠습니다. 2부를 읽으니 부끄러워졌습니다. 2부에서는 현직 교사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가르침,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적은 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섯 살 내 아이에게 무심코 틀어주던 유아 애니메이션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모험을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은 남성이었고, 여성 캐릭터는 수도 적을 뿐더러 분홍색 리본 등으로 역시 '여성성'으로 표상화되어 주요 남성 인물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학생들이 대부분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왔으리라...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은 교실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일상이 되어 있다.(본문 중)


깜짝놀랬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했습니다. 유아용 애니메이션부터, 천만을 동원했다는 흥행 영화까지, 대부분의 미디어에서는 은근히, 남녀의 역할을 규정짓고 남성 중심 사회의 당위성을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에게 흔히 하는 칭찬인 '아름다우십니다.' 몸매가 좋으세요. 젊어 보이세요. 다리가 길어 보이세요'라는 모든 말들이, 악한 마음 없이 칭찬의 뜻으로 여성들에게 했던 말들이 결코 공정하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남성들은 능력으로 평가하면서 여성들은 외모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사라면 누구나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대체 별거인가? 인간을 성별로 제한 짓지 않고 위계적인 성별 이분법 안에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아이들을 우겨넣지 않는 교사, 자신의 교실 언어와 일상 언어에 스민 차별과 편견은 물론, 교육활동의 모든 관습에 질문을 품고 고민하는 교사가 바로 페미니스트 교사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저절로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면서 좋은 교사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본문 중)


페미니스트 하면 여성들만 떠올렸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남성들의 적이라고 여겼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지켜주는 강한 존재들이야라 한다며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책은 더 많이 알기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변하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당해왔던,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의 성차별을 알게 되었고 여성으로서 삶이 남성으로서 삶보다 얼마나 엄격하고 부당한 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주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남자로서의 당연함이 여성들에게는 용기라는 것을 진심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아빠가 되면 아들도 키울 수 있지만 딸들도 키울 수 있습니다. 내 딸이 사는 세상을 그려본다면, 여성에 대한 대우가 다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먼저 깨우치고 현장에서 노력중인 선배 페미니스트 교사들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이 생겼고 그 길을 따라 걷겠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년에 개학을 하면 우리 반에서부터 성별에 따른 차이를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자애들조차 당연하다고 여기는 남녀차별에 대해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딸아이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학부모님이 계시다면, 그 말씀이 아이의 삶에 큰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씀드리려 합니다.


남자,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자연도, 환경도 약자도, 소수도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많이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학교의 중요한 기능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 부족할 것입니다. 원치 않았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아이들 앞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서려 합니다.


전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 10점
홍혜은 외 지음/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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