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8년전...그러니 제가 15살, 중 2때 였습니다. 저는 당시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평범한 중학생이었습니다. 워크맨이 유행했을 때였지요. 주위 친구들이 팝송을 따라부르고 가수들의 노래를 부를 때도 저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가요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팬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손에 들어온 앨범, 신해철 2집 myself 였습니다.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잎을 넣고 정지 버튼을 수십번 눌러가며 한소절 한소절을 따라 적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은 뜻도 모른 채 들리는대로 따라 적었습니다. 그리고 테잎을 몇 백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 앞에선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났고 당시 유행했던 노래방에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첫 미팅...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여학생들 앞에서 부를 수 있었던 노래라고는 신해철 2집 뿐이었습니다. 나름 머릿속으로 가사를 재빠르게 검색했고 제가 세상에 태어나 남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였습니다.
듣기만 했지 직접 불러본 적은 없었습니다. 가사에 색이 바뀌는 것을 따라 부르기 바빴고 가사의 뜻은 모른 채 박자 맞추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노래가 끝났고 친구들은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우와, 니 노래 잘 부르네."
저는 신해철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통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2019년, 며칠 전 아내님과 함께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습니다. '퀸'이라는 영국 록밴드도 처음 접했습니다. 팝송은 저의 관심분야가 아니었습니다. 해서 저는 영화의 OST보다 영화 줄거리 자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중간 중간 나오는 퀸 노래가 익숙한 곡들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곡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이럴수가, 나는 퀸을 모르는 데 이 노래는 들어봤어. 그럼 나도 퀸을 알고 있었던 거구나.'
신해철과 퀸은 저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신해철은 노래를 통해 저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떤 삶이 나의 삶인가? 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던져주었고 퀸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위해 세상의 멸시와 모욕을 참고 견디는 뮤지션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제 생각에 '보헤미안 랩소디'와 '민물장어의 꿈'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유는 곡 자체의 훌륭함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 그리운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같이 살며 앨범을 발표하고 대중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때, 같이 손가락질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하게 그들은 떠났고 그제서야 두 뮤지션에 대한 그리움과 애뜻함이 살아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대중가요에는 무관심합니다. 음악방송을 유독 챙겨봤던 대학시절의 노래들이 지금도 제가 노래방 가면 부르는 유일한 곡들입니다. 모든 곡이 저에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사연이 있는 노래는 저에게 더 애뜻하게 다가옵니다. 이별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노래, 좋아했던 선배가 조용히 들려주던 노래, 친구들 앞에서 처음 불렀던 노래, 외로울 때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들은 지금도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신해철 2집 myself의 '나에게 쓰는 편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신해철은 24세때 이미 삶에 대해 이만큼이나 깊게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40이 넘어서야 삶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신해철과 퀸, 음악과 스토리는 다르지만 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비슷합니다.
'그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자신의 삶을 후회없이 살고 있는가?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밖은 어둡습니다. 퀸의 'Love of my life'를 들으며 글을 적고 있습니다.
밤에 듣는 노래는 깊습니다.
앞으로 20년 뒤, 제가 쓴 글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합니다.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