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청보리가 읽은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

마산 청보리 2014. 2. 14. 13:26

강신주 박사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집어들었다. 강신주 박사를 접한 건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두번째다. 나는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을 잊지 않는다. 강신주 박사 특유의 직설적인 어법과 예리한 지적은 몇 번이나 나의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고통을 치유하는 인문정신'이라는 내용을 총 3부로 구성해놨다. 1부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니체부터 에피쿠로스까지 16명의 철학자들의 책을 소개한다.


2부 '나와 너의 사이'는 칸트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15명의 철학자들을 저서를 통해 만난다. 마지막 3부는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으로 베르그송부터 17명의 철학자를 소개한다. 


강신주 박사는 철학자들의 저서를 소개하면서 독자와 철학자들을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워낙 소개된 책이 많아 '내용이 얕진 않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책을 펼쳤다. 괜한 걱정이었다. 


문득 조그만 깨달음이 내게 찾아왔다. 그건 바로 솔직함과 정직함에 관한 것이었다. 자, 돌아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속내에 정직하고 솔직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있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 읽든지 잊지 말도록 하자.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본문 중에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 실린 강신주 박사의 핵심적인 말이다. '솔직하라' '당당하라' '주인된 삶을 살아라' '자본주의의 최면에서 벗어나라' 등등. 인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강신주 박사의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오늘 내가 진실을 마주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면?

ⓒ sxc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본문 중에서)


니체는 '영원불멸한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기에 지금의 고통은 감내하라는 말에 대해 니체는 브레이크를 걸고 '영원회귀'의 세계관을 제안한다. '영원회귀'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오늘 내가 진실을 마주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면, 10만 년 뒤에도 100만 년 뒤에도 똑같이 회귀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비겁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의 기쁨을 위해 오늘의 내가 비굴하고 고통을 참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만큼의 횟수만큼 인생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어떤가? 당신은 지금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반복돼도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솔직하지 못한 나를 애써 변명하며 살고 있진 않는가?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때다. 


과연 우리는 그들만큼 솔직하고 당당한가? 어쩌면 우리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언제까지 우리는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것인가? 50세에 드디어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된 이지는 우리에게 묻는다.(본문 중에서)


이는 아이의 마음을 강조한 이지의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박수를 칠 때 "임금님은 벌거벗었네"라고 말한 아이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난다. "그래,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어." 그제야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하고 사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에서 순수한 동심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소리를 내고 있는가? 단지 남이 하니까, 남의 자식도 학원에 가니까, 남들이 더 좋은 차 혹은 더 좋은 집에 사니까, 생각 없이 쫓기듯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엄마 아빠,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거예요?"라고 아이들이 질문할 때 "몰라도 돼, 그냥 엄마 아빠 시키는 대로 하면 돼!"라고 말할 것인가? 솔직하고 당당한 삶에 대한 일침! 삶의 주인이 돼야 함을 강조한 대목이다. 


모든 집착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부재하게 될 때 발생한다. (중략)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 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본문 중에서)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큰 깨우침을 얻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자정리'. 만난 것은 분명히 헤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나의 것이 어디 있었으며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은 생각일 뿐 현실이 아니다. 더 이상의 집착도, 욕심도, 큰 의미가 없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2. 나와 너의 사이


칸트는 혁명적이다. 칸트의 진정한 혁명성은 타인을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있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간이 목적이 되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 대목을 놓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윤리적 명령을 토대로 반자본주의적 공동체를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칸트는 '자유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강신주 박사는 책을 통해 행위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인간처럼 자율적인 주체를 '목적'이라 부르고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타율적인 사물을 '수단'이라고 부른다. 즉 주인이 목적이라면 노예는 수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 돈이 목적이 되고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가라타니 고진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기 위해, 원래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모색했다. 칸트의 생각이 이상한 생각인가?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로써 목적 그 자체인가, 아니면 돈을 모으고 소비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의 계층에 따라 존재가치가 달라지는 대상인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다.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잡혔다. 그는 1961년 12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아이히만은 상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無思惟)'의 책임을 부과한다. 그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강조한다. 베버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분업화가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구조화된 사회이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본문 중에서)


이 대목을 읽지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나 자신도 사유하지 않는(무사유)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사유를 하면서 살았던 게 아니라 관습에 의해, 다수결에 의해, 아무런 고민이나 사색 없이 살았던 경우가 많았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살 수 있다니….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에 대한 사유없이 명령만 따라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던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회사의 지시입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습니다" 등의 말들로 나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정당화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난 고민하며 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인 물 마냥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대로 살아왔다. 몸만 살았지 정신은 죽어 있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먹고사는 것이 너무 바쁘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우리에게 아렌트는 심장이 살아 있는지를 묻고 있다.


3.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


▲  강신주 박사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깨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조종돼 살지 말고 스스로 움직이라고 강조한다. 곰곰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sxc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가령 핸드폰을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기존의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산업자본은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월급을 받은 나는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다. 백화점을 들어 갈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의기양양하다. 물건을 흥정할 때도 고자세가 되어 흥정에 임한다. 허나 나의 돈이 상품과 맞교환되는 순간 소위 말하는 '갑'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나는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허전함은 그대로다. 그 물건이 영원한 것도 아니며 나의 만족감 또한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겐 또다시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나타난다. 난 다시 그 물건을 사기 위해 일한다. 그리고 월급날이 되면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에서는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깨치지 못한다면 내가 자본주의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주인은 나, 우리, 즉 노동자가 아니다.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준다. 하지만 그 돈을 다시 환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중들을 유혹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치게 되면 내 삶의 주인이 될 준비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주인은 온전히 나 자신이었나? 모든 것이 나의 의지대로 선택돼 왔는가?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짜인 틀 안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소비가 인간의 행복감을 100%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으로, 나만 위함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위함으로 이뤄질 수 있다. 강신주 박사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깨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조종돼 살지 말고 스스로 움직이라고 강조한다. 곰곰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나의 존재가 가지는 그 특별함과 순수한 의미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존재가치에 대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 강하게 나를 뒤 흔든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는 철학자 48명의 다양한 생각들이 강신주 박사의 시각을 통해 정리돼 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다시 나의 시각을 통해 새로운 스펙트럼으로 나를 뒤흔들었다. 강신주 박사도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유리병 편지를 받았습니다. 스피노자, 장자,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이제 저의 편지를 유리병에 담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의 저의 유리병 편지를 꺼내 읽어볼까요? 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보게 될까요?" 


최소한 기대하는 마음으로 유리병 뚜껑을 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는 내가 보는 세상, 그 위에 또 다른 가치 있는 세상이 있음을, 지식과 감동을 초월하는 독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궁금한가? 혼자 느끼기에는 너무 아쉽다. 세상이 너무 힘든가?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가? 강신주 박사의 책을 펴보길 권한다. 답이 있진 않지만 진실의 길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 된 삶을 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 10점
강신주 지음/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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