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청보리가 읽은 책

정이현 작가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마산 청보리 2017. 1. 27. 07:00



간만에 서점에 갔습니다. 요즘 소설에 매력에 빠진 터라 자연스레 소설코너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많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제목부터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책 표지도 왠지 음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 이 책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책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몰랐는데 정이현 작가님이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2002년 문단에 등장하신 후 수많은 단편, 장편 소설들을 꾸준히 써오신 분입니다. 특히 '달콤한 나의 도시'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9년만에 나온 그녀의 소설집입니다.


총 7편의 단편소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이 단편소설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 소개되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를 읽으며 왠지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 이 책, 묘하네' 그렇게 정이현 소설집의 매력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현실 같아서 더 소름돋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노인들을 위한 고품격 주거 커뮤니티(별칭 양로원)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인형과 살며 연애도 실패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고객인 할아버지의 요구는 뭐든 해결해 줘야 하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미스조는 과거의 여자입니다. 자신의 여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여자였지요. 그녀와의 만남이 설레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어떤 선물을 남깁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든 생각은 뭔가 암울했습니다. 젊은이의 이야기인데 문득 제 친구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속 '나'의 생활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마흔번째 생일 아침,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떠올리며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본문 중)


소설 속 '나'는 짧은 시간에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누구는 거부할 수도 있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묵묵히 수용합니다. 그의 행동거지, 생각의 흐름을 묵묵히 따라가다보면 저 또한 그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묘한 일체감마저 듭니다. 단편소설, '짧은 글 쓰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젠 아닙니다. 이 적은 분량에 이러한 내용을 풀어쓰는 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다음 작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정말 소름돋았습니다. 여러 집의, 다양한 상황을, 다양한 인물의 생활로 보여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간의 이중성, 이기심, 현실의 막막함에 대해 너무 슬프게 공감하였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정작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부끄럽지 않은가?..신기했습니다. 단지 글을 읽는 것 뿐인데 이 책은 되레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 확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안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정이현 작가님의 책을 이제 한권 읽고선 뭐라 평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책에 있는 소설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가 여운이 오래남고, 암울합니다. 암울의 사전적 뜻은 '절망적이고 침울함'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책은 암울합니다. 그 암울함은 '안나'라는 작품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젊었을 때의 생활과 사람들이 흔히들, 쉽게 말하는 남 이야기, 그리고 인연이라는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으며, 엄마의 삶과는 다를 수도 있는 아이의 삶, 우연적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충분히 공감되었습니다. 실제 현실이 더 우연적 요소가 많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이야기


소설 속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할 수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경제적으로 윤택하고 특별한 어려움없이)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삶인지, 타인들은 어떤 고민들을 하며 사는지, 과연 돈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작가는 조용히 묻습니다. 


소설 이야기지만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끄럽다고 입에 담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치부에 대해서 조용히 들춰내는 소설입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그 전 이야기, 그 후 이야기가 절로 상상이 됩니다.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책이고 공감되는 이야기지만 슬픈 이야기입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분들이 읽으시면 감동이 클 것 같습니다. 우연히 고른 책이지만 좋은 만남이었다고 자신하는 책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냥한 폭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상냥한 폭력의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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