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교육이야기

2010년 초, 전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사였습니다.

마산 청보리 2023. 4. 20. 21:07

이제는 말할 수 있다.1(어느 중등교사의 고백)

2010년 초의 일이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담임이었던 나는 봄이 되어 아이들과 꽃구경을 가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0교시에 야간 강제 학습이 행해지던 시절, 매일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만 있는 아이들이 보기 안쓰러웠다. 마침 진해도 인근이라 군항제 열리기 전 아이들과 꽃구경을 가고 싶었다. 학년부장샘께 말씀드리려고 했으나 말하지 못했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학년부장은 교장샘의 허락없인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교장샘은 나와 사이가 좋지않아(?) 허락해 줄리가 없었다. 

해서 난 간 크게도 아이들과 일을 꾸몄다. 몇월 몇일(주말로 기억한다.) 사복 입고 오고 싶은 사람만 진해 어디로 모여라. 단 내가 제안했다고 하지 마라. 우리는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 비밀은 절대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들의 비밀약속은 이렇게 이뤄졌다. 시간이 지나 그 날이 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약속 장소로 갔다. 놀라웠다. 전 학생이 다 왔던 것이다. 남학생, 여학생들은 평소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이쁜 사복을 입고 나름 멋을 부리며 나왔다. 새로웠다. 아이들이 너무 이뻤다. 우리는 별 계획없이 진해 시내를 걸어다니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단체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난 지금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학생들은 이제 20대 후반의 성인들이 되었다. 지금까지 연락 되는 학생은 한명도 없으나 난 그 아이들을 기억한다. 아마 그 친구들도 다른 반 친구들은 경험하지 못했던 당시 추억을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렇다. 난 막 나가는 교사였다. 관리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겁없이(?) 행했던 교사였다. 난 그랬다.

한번씩 그 때가 생각난다. 2학년 2반이었다. 난 지금도 철이 들지 않았다. 돌이켜봐도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학생들과 생활한다. 철 없이, 학교에서, 조직에서 하지말라고 하는 것을 겁없이 행한다. 지금의 학교는 다르다. 내가 하고자 하면 더 잘 해보라고 격려한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인가? 우리 학교가 특별해서 그런 것인가? 확신하기 어렵다. 재밌는 점은 그 땐 막나가는 교사가 지금은 좋은 교사(?)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이다. 난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현장의 목소리가 듣고싶다고 한다. 교육부도, 교육청도 마찬가지이다. 현장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되묻고 싶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지원해줄 수 있는가? 들러리로써 목소리가 필요한가? 구색 맞추기로 목소리가 필요한가? 진짜 현장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보고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서인가?

교사들은 끊임없이 현장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 변화는 없다. 교사들은 각자의 교실에서, 각자의 수업에서, 각자 만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관리자, 동료교사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뇌하고 좌절하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뿐이다. 참다참다 내는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되어 또 다른 좌절감만 각인시킨다.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져 버린 지 오래다. 교육부에 대한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교육부는 매번 뒷북이었고 교사의 목소리보다 다른 목소리에 더 쩔쩔매는 것이, 차라리 보기 안쓰러웠다.

난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의미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윗분들이 인정하는 의미있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 인정하는 의미있는 교사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내가 해 낼수 있는 것에서 길을 찾는다. 그리고 행한다. 행하고선 되돌아본다.

종종 나의 교직생활 과거를 고백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성찰하기 위함이고 누군가에는 긍정적 자극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때문이다. 

중등교사의 고백기, 1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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