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의 함께 사는 세상 ::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있는 이야기.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읽고.


문득 소설이 읽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예전의 저는 소설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고 지어낸 이야기로 사람들을 자극하여 감정을 흔드는 책 쯤이라고 치부했었습니다. 허나 제 생각이 잘못됨을 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소설의 흡입력은 대단합니다. 책을 펼치면 눈을 땔 수가 없습니다. 잘 읽히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사건의 진행과정이 너무나 흥미 진진합니다. 소설책을 여럿 읽다 보니 작가님 마다 특유의 색깔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특정 작가님의 책만 읽을 때도 있었습니다.


일본 작가들의 책도 특유의 매력이 있습니다. 대중적 으로 <하루키 현장>에 버금가는 <바나나 현상>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는 요시모토 바나나작가의 키친을 펼쳤습니다.



단편소설입니다. ‘키친, 만월(키친2), 달빛 그림자’라는 세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키친’과 ‘만월’은 연결되는 이야기 구요. ‘달빛 그림자’는 또 다른,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의 글입니다.


주인공인 ‘사쿠라이 미카게’는 세상에서 부엌을 가장 좋아합니다.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도 끔찍이 좋아합니다. ‘미카게’가 부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나란히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중학교 입학 무렵 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고 그 후 내내 할머니와 둘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할머니 마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 후 매일을 부엌에서 잠들게 됩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한 사흘은 멍하고 지냈다. 눈물도 마른 포화 상태의 슬픔이 흔히 동반하는 나른한 잠의 꼬리에, 조용한 부엌에 요를 깔았다...위-잉, 냉장고 소리가 내 고독한 사고를 지켜주었다. 그곳에서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긴 밤이 가고, 아침이 와주었다.”(본문중)


‘미카게’는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세월을 두고 가족이 줄어들어 지금은 혼자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안계신 큰 집에 혼자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딩동, 느닷없이 현관 벨이 울렸다...「전할 말이 있어서, 어머니랑 의논했는데,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지 않겠어요?」「네?」”(본문중)


이렇게 거의 안면은 없었으나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 ‘다나베 유이치’의 집에 ‘미카게’는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합니다. 물론 ‘유이치’의 엄마이며 아빠인 ‘에리코’씨와 함께 살게 됩니다.


소설은 슬픈 소재를 자연스럽게 풀어갑니다. 젊은 남과 여의 관계이기에 당연히 ‘사랑’이라는 내용이 주가 이룰 것이라 생각하고 읽었습니다. 허나 저자에겐 남녀의 사랑이 그리 큰 비중은 아닌 듯 합니다. 저자는 생명, 삶, 남은 자의 삶에 더 큰 초점을 맞추고 작품을 풀어나갑니다. 


아픔을 가지고 있는 미카게가 유이치네와 살며 나름 즐거운 경험도 하고 기력을 찾아 갑니다. 유이치 가족을 위해 요리도 하게 되고 유이치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들도 듣게 되며, 그래도 최소한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노래하듯, 그녀는(유이치의 엄마인 에리코) 그녀의 인생 철학을 말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았나 봐요.」 감동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뭐 다 그렇지. 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난 그나마 다행이었지」”(본문중)


저자는 ‘에리코’의 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월

-키친 2


“가을 의 끝, 에리코 씨가 죽었다.”(본문중)


‘에리코’씨의 너무나 허망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시작으로 2부는 시작됩니다. ‘에리코’씨를 너무나 좋아했으나 동시에 무덤덤했던 아들 ‘유이치’의 방황이 시작됩니다. ‘유이치’는 별 감정이 없는 듯 묘사됩니다. 엄마를 대하는 태도나 ‘미카게’를 대하는 것도 로봇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허나 이런 ‘유이치’도 ‘에리코’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카게’는 ‘유이치’를 위해 많은 위로와 노력을 합니다. 


죽기 전 미카게와 에리코씨와의 대화입니다.


“그 후 아내는 곧 죽고, 파인애플도 죽어버렸어...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깨달은 일이 있었어. 말로하면 아주 간단하지. 세계는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일에는 대범하게, 되는 대로 명랑하게 지내는 편이 좋다...그 무렵 나는(미카게)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왜 사람은 이렇듯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버러지처럼 짓뭉개져도, 밥을 지어먹고 잠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간다. 그런데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본문중)


‘만월’의 마지막 부분에는 ‘유이치’와 ‘미카게’의 만남을 전제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따뜻한 재회인 셈이지요. 


고아가 된 ‘미카게’의 마음아픔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유이치’ 가족과의 만남, ‘에리코’의 죽음, 혼자가 된 ‘유이치’, ‘유이치’를 위로하는 ‘미카게’로 순으로 전개됩니다. 급박한 흐름은 없으며 반전도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픔을 당했을 때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읽는 이에게 자연스레 고민케 해 줍니다.


‘만월’의 경우 가족의 죽음이 주 소재라면 뒤편에 있는 ‘달빛 그림자’는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어두울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 무겁지 않게, 하지만 진지하고 쉽게 풀어냅니다. 책 읽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책이 국내에도 여럿 번역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바나나’열풍에 휩쓸려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소위 말하는 평범한 삶이 어찌보면 행복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키친 - 10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Posted by 마산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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