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청보리가 읽은 책

당신의 이야기를 썼다면 미안하다.

마산 청보리 2017. 9. 29. 07:00

생활이 무료할 때, 머리가 복잡할 때, 화가 날 때, 슬플 때, 즉 유쾌한 상황이 아닐 때 저는 일부러 소설책을 꺼내 읽습니다. 소설은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읽다보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 공감을 하기도 하며,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남의 삶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소설책은 한번 펴면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립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흡입력이 강합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지어낸 것 같지 않습니다. 작가분들이 대단한 이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소설을 주로 읽는 편입니다. 물론 외국의 유명한 대작들도 많지만 왠지, 정서를 이해하기 쉽고, 번역의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저는 아직까진 한국소설이 좋습니다. 


이 책은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에서 연재되었던 소설이었습니다. 포털사이트인 DAUM에서는 2014년 11월 3일, 작가의 소개 및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11월 10일부터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가 1회였고 2017년 8월 6일, 8번째 작가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DAUM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을 위한 자리를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좋은 일 같았습니다. 실제로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에서 연재되었던 소설이 책으로 세상과 만난 사례가 꽤 되었습니다. ‘눈쇼’도 그런 형태로 나온 임요희님의 소설집입니다.


무료한 날이었습니다. 표지부터 눈에 띄는 책이 있었습니다. ‘눈쇼’ 눈쇼? 눈으로 쇼를 한다고? 표지 그림도 괴상했습니다. 책 뒤표지의 글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요? 네 미안하지만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습니다.

“평범해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 시대의 모든 ‘을’들에게 던지는 무거운 돌직구.(책 소개글 중)


개그감이 넘치는 재미있는 소설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궁금했습니다. ‘을’들에게 던지는 무거운 돌직구? 나도 ‘을’인데? 책장을 넘겼습니다.


책에는 10개의 단편소설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단편소설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우선 읽기에 부담이 없으며 극의 진행이 빠릅니다.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이야기의 이해도 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고 나서 감탄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10개의 단편소설 속에는 행복한 삶을 사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한 여름, 에어컨을 절대로 틀어선 안되는 더운 사무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동료들과 일하는 남자,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특징인 큰 눈을 이용해 ‘눈쇼’를 하며 직장상사들을 웃기며 버티는 C, 9층에 살다가 대책 없는 남편의 대출로 이혼하고 지하에 이사하여 온갖 서러움을 겪고 사는 여작가, 경제적으로 힘든 집에 들어가기 싫어 동료와 술 마시며 놀다가 노래방에서 일하는 엄마를 만나는 나, 크리스마스 즈음 만원짜리 문화상품권 10장이 돌고 도는 이야기, 아내와 사별 후 바이오매트를 산 후 자신보다 젊은 여성과의 잠자리를 통해 자신의 다른 면을 보게 되는 할아버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부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극빈층도 아닙니다. 제가 ‘눈쇼’를 읽으며 소름이 돋았던 것은 우리 주위에서 이런 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이지만 현실이다.


임요희 작가는 자신을 게으른 작가라고 소개합니다. 

-아침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 일어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작가가 되었다. 사람 만나는 일과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일에 게을러 삶의 경험이 부족하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식은 상상을 통해 이룩한 것이다.(작가 소개글 중)


상상을 통해 이룩했다고 하나 이야기들이 예리합니다.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야기의 주인공들 중 직업이 작가가 많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지만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10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10개의 인생을 접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두 평범한 삶,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C는 자기 눈을 더듬었다. 한쪽 눈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의 투박한 질감이 수용소의 벽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비로서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날 C는 자기 눈을 찌르고 구급차에 실려 정신병원에 이송된 것이다. 출입구에 배식구가 달려있는 것으로 봐서 중증환자들만 간다는 C병동에 감금된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재촉하듯 상구가 물었다. C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겠어. 그냥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었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C는 관리자들이 좋아하는 눈쇼를 연습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쇼를 위해 자신을 혹사하기도 합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몸도 상하고 애인과도 헤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정신병원에 이송됩니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친구에게 한 그의 말, “몰라, 모르겠어. 그냥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었어.”


그가 말하는 ‘남’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새 ‘남들처럼’, ‘평범하게’, 라는 말이 입에 달고 있지만 ‘남’이 누구인지, ‘평범한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속의 ‘남’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사는 현대인들의 상실감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임요희 작가는 10편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슬픈 현실을 꼬집어 보여줍니다. 나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처해지는 현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현실, 회사에 살아남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반지하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나의 인격과 권리가 깡그리 무시당하는 현실, 그리고 ‘갑’이 아닌 ‘을’끼리 서로를 다시 무시하는 서러운 현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썼다면 미안하다.

 당신의 불안을 상기시켰다면 더욱 미안하다.

 고의였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알고 있지 않나.

 소설가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거.

 당신이 흔들리길 바란다.

 연질의 젤리처럼 앞으로 뒤로 휘길 바란다.

 마시멜로처럼  폭신폭신해지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을 괴롭힌 것을.

 당신을 위태로움 속에 버려둔 것을.


 2017년 여름, 임요희(본문 중)


책을 덮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을’로 사는 대부분의 독자를 위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과연 개인의 잘못 때문인가? 


책에서는 개인의 잘못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개인들은 착합니다. 각자의 상황에 대해 수긍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작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수긍하고 조용히, 착하게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갑’의 횡포에 대해, 더 이상 조용히 참고 착하게 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우리의 모습을 그 어떤 자비 없이,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혹시 독자분 중 이 책을 읽고 ‘에이 이런 삶이 어디있어?’라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갑’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갑’이라면 알아주십시오. 이 책의 주인공들의 삶, 아니 그보다 더 비참하게 사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가난이 위험한 것은 그 고통의 결과가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마땅할 위엄과 품위의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난’은 불편할 뿐이지 ‘불행’한 것이 아닌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돈을 적게 벌어 온다고 불만인 아이들, 일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보며 속상한 부모님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가족을 위한 삶 중 대충 사는 삶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함께 사는 삶이 왜 필요한지를 임요희 작가는 ‘눈쇼’를 읽으며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임요희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라고 합니다. 임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집니다. 그녀 특유의 시선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의 매력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눈쇼’, 재미있는 책입니다. 

눈쇼 - 10점
임요희 지음/답(도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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